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여기서 멀지 않은 거제도였다. 그 덕분에 이런저런 이유로 통영을 자주 찾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통영이란 이름 대신 충무라 불렸다. 그 이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충무김밥 아니던가. 그 당시와 비교하면 통영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분초를 다투며 변하는 대도시에 비하면 아직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동피랑 마을은 처음 가는 것이다. 예전엔 그런 마을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최근에 벽화마을로 유명세를 타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예전 모습을 간직한 골목길이 있다고 해서 내 관심을 확 잡아 끈 것이다. 통영을 지나다 자연스레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동피랑이란 말은 동쪽에 있는 비탈이란 의미다. 원래 이 산비탈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 동포루가 있던 자리였다. 통영시에선 여기 자리잡은 낡은 마을을 철거해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지난 2007년 한 시민단체에서 이 마을을 보전하기 위해 동피랑 색칠하기캠페인을 벌였다. 벽화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19개 미대팀이 이 마을 담벼락에 벽화를 그린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은 통영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동피랑 마을의 변신이 성공하자, 그 반대편에 있는 서피랑 마을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 오후에 누굴 만나기로 되어 있어 거기까지 들르지는 못했다.

 

통영 강구항에서 제법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야 동피랑 마을의 언덕배기로 오른다.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이 집과 집을 연결하며 마을을 에둘러 간다. 골목마다 담장과 집 벽면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캐나다에도 이렇게 마을 건물에 벽화을 그려 관광객 유치에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있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마을에 활력이 넘치는 것은 당연지사. 모든 것을 깔아뭉개고 그 위에 회색빛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에서 벗어났다는 것만 해도 난 좋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가 궁금했다. 가게야 손님들이 늘어나 수지를 보겠지만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주민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이 몹시 귀찮을텐데 말이다.

 

낡고 퇴락한 마을에 알록달록한 새옷을 입혀 마을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벽에 그린 그림은 아이들 취향에 맞춘 것인지 좀 유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더 스케일이 큰 대작을 그려도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제영이나 충무공과 같은 이 지역의 자랑스런 역사를 그림에 담아도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만화나 동화에서 따온 그림으로 가볍게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솔직히 나에겐 그림의 내용보다 이런 생동감 넘치는 골목길이 살아있다는 자체가 더 큰 기쁨이었다. 특히, 빨강, 파랑의 대조적인 색깔을 칠한 두 집 지붕이 골목을 반으로 나누는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동피랑 마을이 규모가 좀 더 컸더라면 우리 나라에도 외국에 자랑할만한 크레파스 마을이 하나 생기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강구항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꼭대기에 닿았다. 앙증맞은 카페 몇 군데가 장사를 하고 있었다. 몽마르다 언덕이란 표현도, 스타벅스 로고를 본따 만든 굿럭 커피 로고도 마음에 들었다. 옛 마을을 잘 가꾸면 이렇게 멋진 마음의 고향을 얻는데, 우린 그 동안 옛것이라면 모두 때려부수는 재개발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 재개발이 좀더 신중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피랑 마을이 획일적인 재개발을 막고 새로운 공존 전략을 모색하는 시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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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록차 2013.12.07 1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영이라고 불러야 하는데요~~ㅎㅎㅎ

  2. 보리올 2013.12.07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지인들은 토영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토영이야~길도 있다 하더군요. 근데 저한테는 충무란 지명이 더 친숙합니다.

 

 

진주까지 내려온 김에 박정헌 대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이 친구는 사천 출신의 산사람으로 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전형적인 경상도 터프가이 같았다. 그런 그가 2012 8 31일 진주에다 히말라얀 아트 갤러리(Himalayan Art Gallery)를 오픈했다는 이야기를 페이스북을 통해 들었다. 난 그가 열심히 산에나 다니는 산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히말라야 예술에 대한 안목이 이렇게 높은 줄은 미처 몰랐다. 어떤 작품들로 갤러리를 꾸몄을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박대장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바위꾼 중 한 명이다. 알파인 스타일로 히말라야 고봉을 오르던 거벽등반가였다. 지난 2005년인가, 후배 최강식과 둘이서 히말라야 쿰부 지역의 촐라체를 등반하고 하산하다가 최강식이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9일간의 사투 끝에 조난 사고에서 둘 다 살아 돌아온 기적같은 이야기를 <>이란 책으로 엮었다. 물론 그 댓가로 두 사람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야 했다그 후 박대장은 거벽 등반에서 패러글라이딩으로 방향을 전환해 여전히 히말라야를 찾고 있다. 패러글라이딩으로 장장 2,400km에 이르는 히말라야 횡단 비행을 해낸 것이다. 한 마디로 대단한 친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한 내용이 생각난다. 촐라체 조난 사고 당시의 심경 묘사가 너무나 절절해 그걸 보는 순간 내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억이 난다.    

죽음은 한 순간이다.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를 구하려고 할 때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나와서 나를 유혹했다. 또 다른 나는 최강식은 죽었다고 나에게 끝없이 속삭였다. 후배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죽는 길이고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는 길이었다. 23m 깊이 크레바스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다. 후배의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나도 척추가 나간 상황이라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자일을 끊어야만 내가 살 수 있었다. 크레바스 안에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오히려 절망했다.”    

 

갤러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전화를 걸어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박대장이 갤러리 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늦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갤러리에 들어서자, 여긴 한국이 아니라 네팔 박타푸르나 파탄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갤러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을 들이고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했다. 박대장의 안내로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네팔 네와르 건축양식으로 조각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네와르 2층 창틀과 공작새 문양 창틀은 네와르 최고의 목각 장인인 레드 샴 실파카(Radhey Shyam Silpakar)가 기증한 작품이라고 한다. 네팔에서 꽤 유명한 조각들인데 여기서 볼 수 있다니 신기했다. 작품을 고르고 여기까지 가져온 박대장의 노고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그 외에도 박대장이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찍은 히말라야 사진과 소품이 걸려 있었다. 그는 히말라야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산사람이 분명했다. 박물관 뒤에 차실을 하나 마련해 놓아 거기서 차 한 잔을 마셨다. <>이란 책에 저자 서명을 해서 건네준다. 오래 전에 사서 읽었던 책이지만 고맙게 받았다. 어떤 연유로 히말라얀 아트 갤러리를 세웠는지 물었고, 그의 비전을 들었다. 그는 네팔 산악 지역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세우고, 히말라야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며, 세르파의 탐험 활동을 지원하는 꿈을 이루고 싶다 했다. 그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매달 얼마씩를 후원하는 약정서에 서명을 해서 박대장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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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드래곤 2013.12.05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시품도 중요히지만 좋은일도 하시는군요

  2. 보리올 2013.12.05 14: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일들이 더 확산되어야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박대장이 갤러리를 오픈한 취지가 좋으니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리라 믿습니다. 그나저나 드래곤님도 사진과 여행 좋아하시는 것을 보니 역마살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3. 설록차 2013.12.07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향이 가까워 진주에 갤러리를 열었겠지만 위치가 좀 아쉬워요... 서부 경남의 요충지라해도 히말라야 문화를 이해하고 찾아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길 바깥에 위치한 조각 창문틀이 손상되지 않고 잘 보관이 될런지 걱정됩니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든 조각을 보니 예술을 넘어 참선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을것 같아요... 옮겨온 분의 정성도 대단하구요... 배 건너에 외가가 있고 본적도 진주에 있어 그 일대가 눈에 선합니다...^^

  4. 보리올 2013.12.07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방이란 한계는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박대장의 본거지라 이 갤러리를 발판으로 지역 특성을 살린 여러 행사가 치뤄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떤 일이든 열정이 대단한 친구니 잘 꾸려 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언제 고향 가시면 한번 들러 보세요.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차를 몰아 진주로 내려갔다. 요즘 말로 하면 절친인 이 친구는 언제 가도 늘 반갑게 맞아준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열해식당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생선회로 거하게 저녁 대접을 받았다. 광어회가 주종이었는데 뭔가 끊임없이 나오더니 마지막은 랍스터 회로 마감을 한다. 노바 스코샤에 있을 때는 랍스터야 먹고 싶으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해산물이었는데, 여기선 꽤나 귀한 대접을 받는다. 먼저 살을 날로 먹고 남은 것은 매운탕에 넣어 끓여왔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더 하곤 그 친구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친구가 출근하는 길에 따라나섰다. 재첩국으로 아침을 먹고 그 친구 회사까지 따라가기로 한 것이다. 이 지역에선 재첩국으로 유명한 곳이라며 친구가 안내한 곳은 사천에 있는 앞들식당. 재첩국이 나오기 전에 고등어구이와 계란말이가 먼저 나왔다. 어떤 사람은 이 두 가지 반찬이 이 식당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정말 오랜만에 시원하고 깔끔한 맛의 재첩국을 먹을 수 있었다. 밥 한 공기가 금방 바닥이 났다. 이 식당의 낙지볶음도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던데 아침부터 매운 요리를 먹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사천에 있는 그 친구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을 했다. 친구가 다니는 회사는 항공기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항공우주박물관이나 보고 가란다. 이 박물관은 회사 부속 시설로 2002 8월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항공산업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해서 그러마 했다. 어차피 오전 시간은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둘이 걸어서 박물관으로 갔다. 그 친구가 박물관 책임자를 불러 인사를 시킨다. 그 사람이 직접 나를 안내해 박물관을 한 바퀴 돌았다. 한 시간 가량 시간을 뺏은 것 같다. 곧 학생들이 단체로 몰려온다고 하던데 이렇게 시간을 뺏어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실내도 볼 것이 너무 많았고 벽에 붙은 패널을 일일이 읽으려면 하루는 족히 시간을 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대충 건너 뛰면서 중요한 내용만 설명을 들었다. 비행 원리와 항공기 구조에 관심이 많아 그것을 중심으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이 박물관에선 항공기에 어떤 수학 원리와 과학 원리들이 적용되는지를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단순히 이론으로만 배웠던 것을 여기서 직접 비행기에 접목해보는 것이다. 덕분에 학생들이 쉽게 그 기본 원리를 이해한다고 한다. 비행기가 뜨는 원리인 베르누이 법칙은 익히 들어본 적이 있지만, 피타고라스 정리와 뉴튼의 세 가지 운동 법칙이 비행기에 적용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런 노력 덕분에 요즘에는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실내에서 항공기 모형만 보다가 밖으로 나오면 실제 비행기가 전시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엔 6.25 전쟁 때 한국군이 운용했던 퇴역 항공기 13대와 미국이 제공한 퇴역 항공기 5대가 전시되고 있었다. 헬리콥터와 미사일, 전차도 보였다. B29 전폭기와 T-50 고등훈련기는 기체에 적어놓은 표식을 보고 금방 알아 보았다. 1960년대 대통령 전용기로 쓰였다는 항공기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촬영 세트장으로 쓰였던 항공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항공기를 한 자리에 모아 놓다니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짐작이 갔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걱정이 하나 있었다. 항공산업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전략산업으로 국가 안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항공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선진국에 비해 우리 나라는 기술력도 딸리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내수시장이 크지 않아 기술 개발이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점이다. 우리는 미국이나 러시아처럼 자국내 항공기 수요가 그리 많지 않다. 일단 내수 시장을 발판으로 성능을 입증한 후에야 해외시장 개척이 가능한데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듯 해외 수출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KT-1 기본훈련기를 거쳐 T-50 고등훈련기까지 독자 생산할 수 있는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 언제 미국이나 러시아같은 항공산업 선진국과 경쟁해 이길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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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artyLUV 2013.12.03 1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천이 정말 항공산업의 메카인 줄 몰랐네요~^^
    저도 함 시간되면 방문해서 함 둘러보고 맛난 음식도 먹어봐야 겠네요~~
    좋은 정보 너무 잘 보고 갑니다!

    • 보리올 2013.12.03 14: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나라에선 항공산업이라면 사천을 따라갈 곳은 없습니다. 바다도 가까워 해산물을 좋아하시면 삼천포항으로 가시면 됩니다. 언제 한번 꼭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2. 설록차 2013.12.04 0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여기는 제 고향. 가본지 20년이 넘었네요...강산이 두번 변했으니 알아보지도 못할거에요... 대문의 캐치프레이즈를 바꾸셨어요...단걸음이 아닌 한걸음 한걸음...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3. 보리올 2013.12.04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향이 사천이셨군요. 예전에 사천공항에서 비행기를 자주 타곤 했습니다. 삼천포항도 사진 찍는다고 몇 번 갔었고요. 블로그 1년을 넘긴 기념으로 타이틀을 바꿔 보았습니다. 심기일전하자는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는 내 고향 마을이다.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고 아버지 산소도 거기에 있다. 고국에 들를 때면 으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던 곳이었는데, 이 시골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정작 난계 박연(蘭溪 朴堧) 선생이다. 난계도 바로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치세 하에서 문신으로 이조판서까지 지냈다고 한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작곡이나 연주 외에도 음악 이론과 궁정 음악을 정립하고, 악기 제조에 관여하는 등 음악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 그래서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과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런 내용이야 어릴 때 학교에서 익히 배운 적이 있지만 마음에 담지 못하고 그저 지식의 한 조각으로 머릿속에만 남아 있었다. 오죽하면 이곳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난계사나 국악 박물관, 국악 체험관을 흘낏거리기만 했을 뿐, 한번도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주 오래 전에 난계사는 한번 들어가 보았던 기억은 난다. 별다른 감흥도 없이 휙 둘러보고 금방 나왔었다. 동향의 후학으로서 이렇게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위인을 몰라보고 너무 무례를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 고국 방문길에는 꼭 들러보자 마음을 먹었다.

 

이곳이 난계 선생의 출생지라는 것을 가장 잘 활용한 곳은 아마 지자체일 것이다, 영동군이 스스로를 전통 국악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라 지칭하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컨텐츠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지자체에서 이런 엄청난 문화적 컨텐츠를 그냥 썩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1960년대에 시작해 올해 46회가 되었다는 난계 국악 축제가 그렇고, 고당리 금강변에 국악기 체험 전수관과 국악 박물관, 국악기 전시 판매장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난계 선생과 국악을 널리 알리는 것도 모두 이런 맥락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난계 국악기 체험 전수관부터 찾았다. 실내는 한산해서 도통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내실도 텅 비었다. 나 혼자라서 마음 편하게 둘러볼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벽에는 해금이나 대금, 피리, 가야금, 거문고, 편종 등과 같은 악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었고, 가운데는 악기 소리를 하나씩 들어볼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국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그리 크지 않았던 사람에게 새로운 공부가 되었다. 이곳에서 상설 국악 공연도 열리고, 악기를 직접 연주해 볼 수 있는 체험 기회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난계 국악 박물관은 국악기 실물을 주로 전시해 놓고 있었다. 눈에 익은 악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편종(編鍾)이나 소(), 뇌고(雷鼓), 방향(方響)과 같은 악기는 난생 처음 본다. 세상에 이런 악기도 있었나 싶었다. 그 외에도 국악을 연주하는 모습, 악기 만드는 과정을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국악 연대표나 민화, 난계 선생 부부의 영정도 볼 수 있었다. 전시 자료가 엄청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이 박물관은 입장료로 500원을 받았다.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없어 사람을 불러서 돈을 건네야 했다. 500원이면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웬만하면 10, 즉 만원을 넘게 받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이럴 거면 아예 무료 입장을 시키는 편이 좋지 않을까.

 

 

 

 

 

 

 

박물관과 좀 떨어진 곳에 전시된 천고(天鼓)와 난계 동상도 보았다. 천고는 세계 최대의 북이라 자랑을 늘어 놓고 있었다. 북의 지름이 5.54m, 무게는 무려 7톤이나 나간다니 크긴 무척 컸다. 2010년에 완성되어 2011년 기네스 북에도 등재되었다 한다. 천고를 보면서 기네스 세계 기록이 무슨 대수고, 억지로 만든 이런 기록에 과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세계 최대란 소리를 듣고 싶었나? 지자체가 내실보다는 쓸데없는 허명을 좇는 것 같아 공연히 마음이 쓰였다.

 

  

 

 

 

난계사는 예전에 한번 들어왔던 곳이라 낯설진 않았다. 30년도 더 지난 것 같았다. 그 동안 관리를 잘 해서 예전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처마에 칠한 단청도 그리 오래되지 않아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은 듯 했다. 여기도 몽땅 내 차지였다.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적막강산이었다. 제일 안쪽에 있는 사당 앞에 서서 난계 선생의 영정을 조용히 들여다 보았다. 우리 고향을 빛낸 인물에게 영정 앞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림으로써 마음 속에 있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밀린 숙제 하나를 후딱 해치운 기분이 들어 난계사를 빠져 나오는 발길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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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ustin 2013.12.08 1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과연 어떤 글과 사진을 보게 될까 둘러보다가 영동이 보였고 할아버지 산소가 생각나서 클릭을 하였는데, 저도 금시초문이었던 국악과 난계 박연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과 친척들과 할아버지를 뵈러 산소를 가긴 갔었는데 왜 한번도 듣지 못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들었는데 제가 잊어버린걸까요? 조만간 기회가 되면 할아버지께 오래간만에 인사도 드리러가고 저도 박물관에 다녀와야겠습니다.

  2. 보리올 2013.12.08 14: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 이번에 한국 들어가면 할아버지 산소도 다녀오고 그 김에 난계사와 박물관도 들러 보거라. 내가 진즉 데리고 갔어야 하는데 너무 무심했단 생각이 드는구나.

 

시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군산 해망동 달동네였다. 서울에 있는 달동네 골목길을 찍겠다고 주말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 벌써 10년도 넘었다. 그 때는 서울이란 지역으로 한정해 작업을 했는데, 서울 밖에도 멋진 골목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끔 청주나 전주, 군산, 부천까지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군산은 어느 사진 모임을 따라 원정을 왔었다. 월명동 일본 가옥과 이곳 해망동 골목길이 우리 촬영지였는데, 바다를 끼고 있는 골목길이 아름다워 군산에 후한 점수를 준 적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동네라 하여 해망동(海望洞)이라 불린다. 군산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배기에, 어찌 보면 바다 풍경이 보이는 별장지같은 명당 자리에 촘촘히 옛 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사이를 구불구불 골목길이 누비며 미로처럼 언덕 위로 가지를 뻗는다. 아련한 옛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해망동 골목길이라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 다시 찾은 것이다.

 

왜 하필이면 여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을까? 군산항은 일제시대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 수출항으로 번창했던 곳이다. 1980년대까지는 산업화 대열에 편승해 수산업과 목재업으로 제법 흥청댔다고 한다. 해방후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이 언덕배기에 집을 짓기 시작했고 여기에 군산항 부두 노동자들이 가세를 하여 규모가 제법 커졌다고 한다.

 

마을 전체 분위기는 전에 다녀갔을 때와 비교해 그리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을 형세가 점점 퇴락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어떤 집은 빈 집으로 방치돼 폐허가 되어 버렸다. 어떤 영화에 영자미장원으로 나왔다던 노란색 이층건물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고, 이미 문을 닫은 허름한 이발소 산해이용원도 얼마 후엔 헐리고 말 것이다. 재개발이란 미명 아래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떠나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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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리나래 2013.04.08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산 해망동은 그야말로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죠..
    여름에는 너무 시원해서 '해망동 산다'고 큰 소리로 말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는 곳이죠

  2. 보리올 2013.04.08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습니까? 여름에는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러와 해망동 사는 보람을 느끼겠네요. 바다를 내려다보는 위치는 정말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