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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본향, 영동

여행을 떠나다 - 한국

by 보리올 2013. 12. 2.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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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는 내 고향 마을이다.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고 아버지 산소도 거기에 있다. 고국에 들를 때면 으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던 곳이었는데, 이 시골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정작 난계 박연(蘭溪 朴堧) 선생이다. 난계도 바로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치세 하에서 문신으로 이조판서까지 지냈다고 한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작곡이나 연주 외에도 음악 이론과 궁정 음악을 정립하고, 악기 제조에 관여하는 등 음악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 그래서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과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런 내용이야 어릴 때 학교에서 익히 배운 적이 있지만 마음에 담지 못하고 그저 지식의 한 조각으로 머릿속에만 남아 있었다. 오죽하면 이곳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난계사나 국악 박물관, 국악 체험관을 흘낏거리기만 했을 뿐, 한번도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주 오래 전에 난계사는 한번 들어가 보았던 기억은 난다. 별다른 감흥도 없이 휙 둘러보고 금방 나왔었다. 동향의 후학으로서 이렇게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위인을 몰라보고 너무 무례를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 고국 방문길에는 꼭 들러보자 마음을 먹었다.

 

이곳이 난계 선생의 출생지라는 것을 가장 잘 활용한 곳은 아마 지자체일 것이다, 영동군이 스스로를 전통 국악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라 지칭하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컨텐츠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지자체에서 이런 엄청난 문화적 컨텐츠를 그냥 썩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1960년대에 시작해 올해 46회가 되었다는 난계 국악 축제가 그렇고, 고당리 금강변에 국악기 체험 전수관과 국악 박물관, 국악기 전시 판매장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난계 선생과 국악을 널리 알리는 것도 모두 이런 맥락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난계 국악기 체험 전수관부터 찾았다. 실내는 한산해서 도통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내실도 텅 비었다. 나 혼자라서 마음 편하게 둘러볼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벽에는 해금이나 대금, 피리, 가야금, 거문고, 편종 등과 같은 악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었고, 가운데는 악기 소리를 하나씩 들어볼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국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그리 크지 않았던 사람에게 새로운 공부가 되었다. 이곳에서 상설 국악 공연도 열리고, 악기를 직접 연주해 볼 수 있는 체험 기회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난계 국악 박물관은 국악기 실물을 주로 전시해 놓고 있었다. 눈에 익은 악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편종(編鍾)이나 소(), 뇌고(雷鼓), 방향(方響)과 같은 악기는 난생 처음 본다. 세상에 이런 악기도 있었나 싶었다. 그 외에도 국악을 연주하는 모습, 악기 만드는 과정을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국악 연대표나 민화, 난계 선생 부부의 영정도 볼 수 있었다. 전시 자료가 엄청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이 박물관은 입장료로 500원을 받았다.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없어 사람을 불러서 돈을 건네야 했다. 500원이면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웬만하면 10, 즉 만원을 넘게 받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이럴 거면 아예 무료 입장을 시키는 편이 좋지 않을까.

 

 

 

 

 

 

 

박물관과 좀 떨어진 곳에 전시된 천고(天鼓)와 난계 동상도 보았다. 천고는 세계 최대의 북이라 자랑을 늘어 놓고 있었다. 북의 지름이 5.54m, 무게는 무려 7톤이나 나간다니 크긴 무척 컸다. 2010년에 완성되어 2011년 기네스 북에도 등재되었다 한다. 천고를 보면서 기네스 세계 기록이 무슨 대수고, 억지로 만든 이런 기록에 과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세계 최대란 소리를 듣고 싶었나? 지자체가 내실보다는 쓸데없는 허명을 좇는 것 같아 공연히 마음이 쓰였다.

 

  

 

 

 

난계사는 예전에 한번 들어왔던 곳이라 낯설진 않았다. 30년도 더 지난 것 같았다. 그 동안 관리를 잘 해서 예전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처마에 칠한 단청도 그리 오래되지 않아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은 듯 했다. 여기도 몽땅 내 차지였다.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적막강산이었다. 제일 안쪽에 있는 사당 앞에 서서 난계 선생의 영정을 조용히 들여다 보았다. 우리 고향을 빛낸 인물에게 영정 앞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림으로써 마음 속에 있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밀린 숙제 하나를 후딱 해치운 기분이 들어 난계사를 빠져 나오는 발길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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