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가 내렸다. 전날 수퍼마켓을 찾지 못해 빵집에서 산 빵과 햄으로 아침을 대충 때웠다. 우의를 입고 밖으로 나섰다. 빗방울이 굵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무슨 비석 세 개가 희미하게 보여 다가갔더니 엘 시드와 관련된 유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엘 시드로 알려진 로드리고 디아쓰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가 여기 출신이었고, 그의 무덤이 대성당 안에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세 개의 비석은 솔라 델 시드(Solar del Cid)라 불렸는데, 호세 코르테스(Jose Cortes)1784년에 엘 시드의 집이 있던 곳에 세운 건축물을 의미했다. 부르고스 대학교를 지나면서 구름 사이로 어설프게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볼 수 있었다. 해가 떠오르자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어느 순간 비가 그치고 말았다.

 

라베(Rabe)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다 되어간다. 종소리를 듣고는 사람들이 하나둘 성당으로 몰려 들었다. 미사가 곧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마을을 벗어나 오르막 경사를 오르니 평평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본격적으로 메세타(Meseta)가 시작되는 것이다. 해발 800m에서 1,000m에 이르는 구릉 지대에 끝없이 밀밭이 펼쳐지는 곳이 메세타지만 지금은 벌판이 텅 비어 있었다. 여름이나 겨울에는 혹독한 기후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부르고스에서 레온(Leon)에 이르는 구간을 건너뛰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늦가을이고 하늘엔 구름이 가득해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풍경이 단조로운 것이 흠이었지만 푸른 하늘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것만 해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메세타 지역이라고 완전 평평한 것은 아니었다. 완만한 구릉지대에 걸맞게 오르막도, 내리막도 나타났다. 언덕에 올라서니 저 아래 자리잡은 오르니요스(Hornillos)가 눈에 들어왔다. 내리막 길을 지나 들판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개미새끼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오르니요스에 있는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샀다. 마을로 오다가 만난 한국인 젊은이와 함께 나눠 먹었다. 이 친구는 광고회사에 다니다 사직을 하고 조만간 창업을 한다는 3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인상도 좋았고 실제 성격도 싹싹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니요스에서 온타나스(Hontanas)에 이르는 11km를 함께 걸었다. 날씨도 점점 좋아져 푸른 하늘이 영역을 크게 넓히고 있었다.

 

아로요 산 볼(Arroyo San Bol)에 천연샘이 있다고 들어 유심히 찾아보았지만 마을 자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샘물에 발을 담그면 순례 중에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다는 속설이 있다고 해서 은근 기대하고 왔는데 말이다. 사실 어느 허름한 건물 벽에 붉은 페인트로 산 볼이라 적힌 것은 보았지만 그것이 마을을 지칭하는 것인 줄은 몰랐다. 산 볼엔 실제 마을이 없었다. 알베르게로 쓰는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였다. 예전에는 여기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16세기 초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전염병이 창궐했거나 아니면 여기 살았던 유대인들이 추방되면서 마을이 없어졌을 것이라 추정만 할 뿐이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온타나스가 보이지 않았다. 언덕에서 내리막으로 들어서니 그 아래에 마을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무니시팔 알베르게에 들었다. 관리를 맡고 있는 모녀가 둘다 불친절했다. 부엌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시설은 엉망이었다. 사람이 적은 이유를 알만했다. 순례 첫날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난 미국 한인 자매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덴버에서 온 언니는 잘 걷는 편이지만 LA 동생은 무척 힘들어 해서 버스를 타고 앞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언니되는 이영애 선생이 라면에 감자, 양파를 넣고 찌개를 끓이고 밥을 해서 넷이서 함께 저녁으로 먹었다. 나도 배낭에 고히 모셔둔 고추장을 꺼내고 와인을 한 병 샀다. 남은 쌀로 밥을 해서 다음 날 먹을 누룽지를 만들었다.

 

엘 시드의 집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솔라 델 시드

 

부르고스 대학교를 지나는데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면서 비도 그쳤다.

 

무슨 의미를 지닌 조형물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부르고스를 벗어났다.

 

다른 성당과는 형태나 색깔이 달라 내 시선을 끌었다.

 

고속도로 위로 난 도로를 걸어 고속도로를 건넜다. 고속도로는 너무나 한산했다.

 

 

순례자 병원이 있던 곳에 세운 돌 십자가를 지나 타르다호스(Tardajos) 마을로 들어섰다.

 

 

 

라베 마을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어느 집 벽면에 쓰여진 낙서가 눈길을 끌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리는 내용 옆에 가스 시추공을 반대한다는 격문도 적어 놓았다.

 

아담한 누에스트라 세뇨라 모나스테리오 성당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메세타가 시작되었다. 고원지대에 드넓은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르니요스로 향하는 순례길이 벌판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고 있다.

 

 

시골의 조그만 마을 오르니요스를 지났다. 화분을 걸어놓은 모습에서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오르니요스의 산 로만 성당 앞 광장에는 수탉 조각을 올려놓은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지나쳤다.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구입한 오르니요스 가게. 산티아고까지 469km 남았다 적혀 있었다.

벽면에 붙여놓은 각국 화폐 가운데 우리 돈 1,000원짜리 지폐도 있었다.

 

 

오후 들어 날씨가 좋아지면서 메세타 지역의 풍경이 살아나고 있었다.

 

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인연으로 같이 점심도 먹고 온타나스까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 젊은이 장석민씨.

 

 

하루 묵을 알베르게가 있는 온타나스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서 밥과 찌개로 넷이서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 날 먹을 누룽지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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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rney 2015.12.01 0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 한 편을 읽는 것 같네요. 힘내세요! :)

  2. 2015.12.01 16: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보리올 2015.12.01 1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제안 여러 번 받아 아직 마음에 없다고 답글도 남겼고 최근엔 삭제까지 했는데 여전히 계속되네요. 관심을 보여줘 고맙긴 합니다만 이제 그만 하시죠.

  3. Justin 2016.01.12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르니요스 가게의 화폐들을 보니 예전에 아버지께서 도와주셨던 저의 초등학교 방학 숙제가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전 6 30분이 되어서야 알베르게에 불이 들어왔다. 늦어도 8시까지는 퇴실을 하라고 하는데 아침 취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바쁠 수밖에 없겠다. 배낭 안에 고히 모셔둔 곰탕 라면 세 개를 끓여 세 명이 나눠 먹었다. 비록 라면 한 봉지지만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이 그냥 좋았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지만 알베르게를 나서 도로옆 오솔길로 들어섰다. 길은 어두컴컴했다. 도로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산티아고가 790km 남았다고 적혀 있었다. 차가 달리는 도로라 사람이 걷는 거리완 좀 차이가 나는 듯 했다.

 

하늘이 밝아 오는 시각에 부르게테(Burguete)에 도착했다. 이곳은 헤밍웨이가 스페인에 머무를 당시 송어 낚시를 하러 자주 오던 마을이라 했다. 그가 체류했던 호텔은 길가에 제법 번듯한 건물로 남아 있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헤밍웨이를 자주 접하게 된다. 플로리다에 살았던 그의 집도, 아이다호에 있는 그의 무덤도 보았으니 말이다. 어제부터 함께 걷는 학생이 현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은행으로 갔더니 새벽부터 문을 열어 깜짝 놀랐다. 하지만 현금지급기가 없어 다른 은행으로 가야 했다. 마을 밖에선 서서히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위로 해가 솟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기도 산악 지형에 속하는지 제법 오르내림이 심했다. 숲길도 많아 나무 터널을 지나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예쁜 마을을 지났다. 붉은 지붕에 흰 벽을 지닌 집들은 나름 고풍스런 느낌이 들었다. 현대식 성당이 있는 에스피날(Espinal)을 지나 알토 데 에로(Alto de Erro)를 넘으니 쑤비리(Zubiri)가 그리 멀지 않았다. 21km 거리를 6시간에 걸어 오후 2시에 쑤비리에 도착했다. 김 신부님과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로 점심 식사를 했다. 웨이트리스가 아침에 한국어를 배웠다며 우리에게 ‘안녕’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써먹는다.

 

신부님은 쑤비리에서 묵겠다고 해서 작별 인사를 건네고 마을을 빠져 나왔다. 난 일정이 빠듯해 남들보다는 조금씩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쑤비리를 빠져나오는 다리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줄리와 사이먼 부부를 만났다. 순례길에서 또 만나자 했지만 그들이 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홀로 유유자적 걷는 길에 햇볕이 작렬한다. 가을이 한창인 10월에도 이럴진데 한여름에는 얼마나 뜨거울까 싶었다. 조그만 마을을 두 갠가 지나 오후 4시에 라라소아냐(Larrasoana)에 도착했다.

 

거기엔 지자체, 즉 무니시팔(Municipal)에서 운영하는 조그만 알베르게가 있었다. 그 많던 한국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맥주 한잔으로 먼저 목을 축인 후 장을 보러 수퍼마켓으로 갔다. 알베르게에 조그만 부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이 닫혀 있는 수퍼마켓은 벨을 누르면 이층에서 주인이 내려와 물건을 판다. 물건도 종류가 많진 않았다. 쌀과 파스타 면, 그리고 과일을 좀 샀다. 계산을 하니 우리 말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계산기 앞에도 ‘맛있게 드세요’라고 한글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한국인이 이 순례길에 많기는 정말 많은 모양이다.

 

알베르게에서 혼자 저녁을 준비했다. 밥을 해서 곰탕 라면에 넣고 죽처럼 만들었다. 양이 많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난 사실 한국 음식에 대한 집착은 별로 없다. 한달 내내 스페인 음식만 먹으라 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이렇게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으면 돈이 크게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순례자 메뉴로 식사를 했는지 알베르게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든다. 덕분에 나만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다 밤늦게 침실로 들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론세스바예스를 빠져 나와 순례길로 접어 들었다.

 

 

안개가 마을을 덮고 있는 부르게테.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 발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은행은 문을 열었다.

 

헤밍웨이가 자주 찾아와 묵었다는 부르게테 호스탈.

 

 

 

부르게테 마을을 벗어나니 안개 사이로 해가 솟았다. 소를 방목하는 목장에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쑤비리 마을로 향하는 순례길에도 따스한 햇살이 내려쬐고 있었다.

 

 

에스피날로 들어서는 초입에서 나뭇줄기 사이로 빛내림이 펼쳐졌고, 안개또한 마을을 동화속 풍경으로 만들었다.

 

 

 

지나는 마을마다 예쁜 집들로 가득했다. 석조 건물을 하얗게 칠해 더 아름다웠던 것 같았다.

 

우리가 양떼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듯 했다.

 

 

나무 사이로 뚫린 길은 그늘을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시원한 청량감도 선사했다.

 

 

쑤비리로 드는 지점에 고딕 양식의 라비아 다리(Puente de la Rabia)가 있다.

거기서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온 줄리, 사이먼을 다시 만났다.

 

 

 

10유로짜리 순례자 메뉴로 점심을 먹은 쑤비리의 오기 베리(Ogi Berri) 식당. 메인으론 빠에야가 나왔다.

 

에스퀴로츠(Esquirotz)란 조그만 마을에서 화려한 꽃장식을 한 집을 발견했다.

 

 

 

 

그리 크지 않은 라라소아냐 마을의 시골 모습.

 

저녁으로 준비한 곰탕라면죽. 산에서 캠핑하면서 즐겨먹던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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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농돌이 2015.11.20 2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해서 구독하렵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저도 가고
    싶은 곳! 함께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 보리올 2015.11.21 0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의 응원에 정말로 힘이 솟는 느낌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가시는 꿈을 꾸시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겁니다. 저도 함께 기원하겠습니다.

    • 농돌이 2015.11.21 0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감사합니다
      봉급쟁이 터는 날 바로?
      오늘은 김장합니다 새벽에 씻어서
      놓고보니 산 입니다 ㅋ 종손의 무게거니 합니다
      멋진 글과 사진 소망합니다

    • 보리올 2015.11.21 0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종갓집에서 김장을 하고 계시는군요. 예전에 시골집에서 김장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2. justin 2015.12.08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순례길 사진이 산과 같은 풍경의 사진과 틀립니다. 자연과 인간과 동물이 잘 어우러져있습니다.

    • 보리올 2015.12.08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사람사는 마을을 연결해 걷는 것이기 때문에 산 속을 걷는 산행과는 풍경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지. 순례길 전구간에 산행같은 곳은 세 구간뿐이었다.

  3. 해인 2015.12.27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쁘게 꽃장식이 된 집들 사진을 보니, 빨리 봄이 왔으면 하는 저는 역시 천상여자인가봐요 ;) 갑자기 옛날에 살던 하우스가 그립기도 하고요. 그런데 끼니를 저렇게 때우시니... 살이 쭉쭉 빠지겄어요. 하루에 20-30km를 걸으면서 소비되는 열량은 엄청나겠죠?

    • 보리올 2015.12.27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통 성인의 하루 대사량을 2,500 칼로리로 본다면 30km를 걸으면 아마 에너지로 5,000칼로리는 쓰지 않을까 본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섭취하는 열량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지. 다이어트엔 정말 최고라 생각한다.

  4. 제시카 2015.12.31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우리아빠 사진 완전 짱이네용... 빛이내리는사진하구, 안개속에서 홀로 서있는 나무사진이 넘 이뻐요.. 저렇게 간단히 끼니 때우셨으니 그렇게 살이 빠지시죠!! 앞으로 하루에 하나씩 읽어야겠네염 ㅋㅋㅋㅋ

 

새벽 6시가 되었는데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리에 누워 마냥 기다리다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산티아고 순례 첫째 날인데 시작부터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침은 알베르게에서 제공했다. 바게트에 버터와 잼이 전부였다. 그 옆에선 헬레나(Helena)란 여자가 건강에 좋다는 유기농 주스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작곡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는 사람이 돈 몇 푼을 위해 새벽부터 재료를 들고 온 것은 가상한데 그래도 주스 한 잔에 3유로면 너무 비싸다. 그녀 프로필을 읽다가 캐나다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다는 내용을 보곤 바로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7시 조금 넘어 알베르게를 나왔다. 어제 루르드(Lourdes)에서 만나 생장 피드포르까지 함께온 김 신부님과 함께 걷는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신부님은 2012년에도 이 순례길을 걸었다고 했다. 생장을 벗어나 가파른 오르막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이 나폴레옹 루트라 했다. 숨도 가프고 땀도 흘렀다. 날씨는 비가 쏟아질 듯 잔뜩 구름을 머금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살포시 여명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상황이다. 생장에서 8km 지점에 있는 오리손(Orisson)에 도착해 알베르게에서 와인 한 잔을 했다. 처음엔 차를 한잔 마시자 했으나 차와 와인이 모두 2유로라 해서 아무 망설임없이 와인으로 정했다. 승용차를 타고와 여기서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론세스바예스로 넘어가는 나폴레옹 루트로 들어선 지가 한참 된 것 같은데 뒤늦게 나폴레옹 루트가 열려 있다는 표식이 나타났다. 눈이 쌓였거나 악천후인 경우에 여기까지 왔다가 되돌아서는 황당한 상황은 없는지 내심 궁금해졌다. 구름 사이로 사람들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어느 정도 올라왔는지 오르막 경사가 좀 순해졌다. 날씨만 맑다면 피레네 산맥의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인데, 그 아름답다는 풍경이 구름에 모두 가려 좀 아쉬울 뿐이었다. 가끔 구름이 걷히면 푸른 초지에 소나 말,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산등성이를 넘자 푸른 초지와 가축들이 사라지고 너도밤나무 숲이 길 양쪽으로 도열하듯 서있었다. 구름에 살짝 가린 숲이 오히려 아름다웠고 누렇게 물든 이파리에서 가을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지났다. 거창한 국경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국경이라는 표식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를 반긴 것은 나바라(Navarra) 자치주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전부였다. 산티아고에서 생장 피드포르를 향해 역으로 걷고 있던 포르투갈 청년은 그래도 프랑스 땅으로 들어선다고 감격에 겨워했다. 우리는 순례 첫날인데 그 친구는 종점에 섰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도 국경은 너무 싱거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길가에 세워진 조그만 쉘터에서 빵과 과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오늘 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라는 고개에서도 세찬 바람을 맞아야 했다. 고개를 넘으면 줄곧 내리막이다. 배낭을 내려 물을 한 모금 하고 있는데 내 행색이 어땠는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온 사람이 있었다. 미시간 주에서 변호사를 한다는 중국계 미국인 마샬(Marshall)이었다. 함께 내려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계라 하지만 자기는 중국말도 못하고 어릴 때 한 번 빼곤 중국에 가본 적도 없단다. 더 웨이(The Way)란 영화를 보고 이 길을 걷는 꿈을 키워왔는데, 잘 걷지도 못하는 부인이 따라왔다고 했다.

 

드디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웅장한 모습의 수도원 건물이 알베르게로 변해 있었다. 어제 생장의 알베르게에서 만나 오늘 구간을 함께 걸은 자크와 필립하고 여기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프랑스 르푸이(Le Puy)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한 달을 걸어왔고 여기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스페인 구간은 내년에 걸을 예정이란다. 언제라도 쉽게 올 수 있는 이들이 부러웠다. 현대적 시설로 개조한 알베르게에 들었다. 한국인이 10여 명 보였다. 18살 고등학교 3년생도 둘이나 있었다. 김 신부님과 밖에서 순례자 메뉴로 저녁을 먹고 오후 8시에 시작하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지루하긴 했지만 우리의 앞길을 축복하는 미사라니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순례자들을 상대로 헬레나가 판매하던 유기농 건강 주스. 인쇄된 프로필을 나누어 주며 자기 홍보도 열심히 한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지만 구름 사이로 여명이 조금 보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노란색 화살표.

지역마다 이정표는 형태를 달리 했지만 노란 화살표는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시야가 훤히 트이진 않았지만 흐린 날씨에도 목가적인 풍경은 감상할 수 있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은 두 개가 있다. 일반적으론 나폴레옹 루트를 걷지만

눈이 쌓이거나 악천후에는 이 길을 통제하고 발카를로스(Valcarlos) 루트로 우회를 하게 한다.

 

 

두 시간을 걸어 도착한 오리손 알베르게. 차 한 잔 하러 들어갔다가 와인을 마셨다.

하루에 여기까지 걸어와 묵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피레네 산기슭은 방목을 하는 소나 양이 많았다.

트럭에 양을 실으려는 목동과 한사코 차에 타기를 거부하는 양떼도 만났고,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양떼도 보았다.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왔다는 줄리(Julie)와 사이먼(Simon) 부부.

캐나다, 그것도 같은 주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자 나타난 너도밤나무 숲. 구름과 어우러진 모습이 신비스러웠다.

 

너무도 싱겁게 지난 프랑스-스페인 국경. 국경을 알리는 어떤 표식도 없었다.

 

 

 

바람도 점점 드세지고 이슬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옛 수도원 건물을 현대식 시설을 갖춘 알베르게로 개조를 했다. 하루 183명을 수용할 수 있는 꽤 큰 시설이었다.

 

 

 

순례자 메뉴로 저녁을 먹은 식당 카사 사비나. 오후 7시가 되어야 순례자 메뉴를 내놓는다.

수프와 메인 메뉴인 헤이크(Hake) 생선요리, 요구르트 해서 3코스에 10유로를 받았다.

와인은 테이블당 한 병을 내놓는데 우리는 둘이라 양은 충분했다. 음식은 대체로 맛이 좋았다.

 

저녁을 마치고 참석한 순례자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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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유리안나 2015.11.28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두 곧 가려고 준비중입니다
    좋은글 잘 읽어보겠습니당

  2. Justin 2015.12.01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아버지의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를 보게 되네요! 저도 나중에 꼭 걷게 될 순례길을 아버지 블로그 통해서 예습하겠습니다.
    우리 형숙이와 함께요 ^^

    • 보리올 2015.12.01 0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제 아주 온라인에 공개를 하는구나. 우리 형숙이라... 잘 해주고 즐거운 시간 많이 가져라. 순례길도 미리 잘 봐두고. 12월 들어섰으니 한 해 마무리 잘 하길 바란다.

  3. 제시카 2015.12.04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캬~ 여행의 시작은 역시 알코올이죠 ㅋ.ㅋ 저도 유럽에서 물대신 맥주를 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숲속의 사진은 해리포터에서 나온듯한.. 사진같아요 *_* 스페인으로가는 국경을 지나도 스페인인거같지 않겟어요 ㅎㅎㅎㅎ

    • 보리올 2015.12.04 15: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 집에 술꾼 한 명 나왔구만. 유럽에선 물 대신 맥주를 마셨다고? 난 순례자 메뉴를 먹을 때나 겨우 와인 한잔 했는데 말이야.

  4. 해인 2015.12.27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인 한 잔에 2유로라니, 1일1와인 하셨었겠네요. 제가 상상했던 알베르게의 시설은 아주 저렴하다기에 조금은 어두침침하고 낡고 시설이 많이 빈약할 줄 알았는데, 세련되고 잘 되있는데요? 상상했던거랑은 아주 달라서 흥미로와요.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하며 걸으시니, 참 좋으셨겠어요.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오신 분들은 더욱더 각별하셨겠다! 이래서 여행이 좋아요 (엄지 척!)

    • 보리올 2015.12.27 1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와,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 저 와인은 한잔에 2유로를 받아 엄청 비쌌던 거야. 스페인은 한 병에 2유로 하거든. 그야말로 와인 천국이지. 알베르게는 시설이 천차만별이란다. 이 알베르게는 새로 설비를 갖춰 좋은 편이었지. 순례길에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귄단다. 너도 직접 걸으며 경험을 해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