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孔府)는 공묘 오른쪽에 바로 붙어 있었다. 출입문이 달라 공묘를 빠져나와서 5분을 걸어야 했다. 공부는 공자의 직계 자손이 대대로 살았던 저택으로 성부(聖府)라고도 불렸다. 실제 대문에 성부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공자 후손들이 얼마나 오랫 동안 귀족 대우를 받으며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현재까지도 공부에는 152채의 건물에 480개나 되는 방이 있다고 한다. 건물을 일일이 찾아다니기가 힘이 들었다. 공자 가문의 종손은 송나라 때부터 연성공(衍聖公)이란 관직을 받아 집안에서 업무를 보았기 때문에 공적 업무를 보는 공간이 있었고, 뒷채로 갈수록 가족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나타났다.

 

공부를 나와 공림(孔林)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걷기엔 좀 먼 거리라 셔틀버스가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걸어가기로 했다. 만고장춘(萬古長春)이라 적힌 문을 지나 공림 입구에 닿았다. 공림은 지성림(至聖林)이라고 불린다. 공자묘부터 찾아갔다. 공자 묘소 앞에는 대성지성문성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시호가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왕자를 함부로 쓸 수 없어 길게 늘여쓴 트릭도 보였다. 공자묘 옆에는 공자의 아들인 공리(孔鯉)의 무덤이 있었고, 손자 공급(孔伋)의 묘는 좀 떨어져 있었다. 공급은 자사(子思)라고도 불리는데 공자의 학맥을 이어받아 중용(中庸)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공씨 후손들도 죽으면 공림에 묻혔다. 공자나 공리, 공지의 묘소와는 달리 야산에 초라하게 쓴 무덤들이 엄청 많았다.

 

 

 

 

 

 

 

 

 

(사진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공부를 성부라 부르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공림은 노목들 사이로 공자와 그 후손들 묘소가 산재해 있다. 2천 년의 세월에 걸쳐 10만 명의

공자 자손들이 여기에 묻혔다.

 

 

 

 

 

'여행을 떠나다 - 아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저장성 항저우  (2) 2015.04.28
중국 저장성 이우  (2) 2015.04.27
중국 산둥성 취푸, 공부/공림  (2) 2015.04.23
중국 산둥성 취푸, 공묘  (2) 2015.04.21
중국 산둥성 취푸  (2) 2015.04.20
중국 산둥성 타이안, 타이산 ②  (2) 2015.04.16
Posted by 보리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justin 2015.04.23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자 공부의 절실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취푸(曲阜)는 인구 65만 명을 가진 조그만 도시지만 도시 전체가 공자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때는 노나라의 수도였고 중국 고대사에 나타나는 황제(黃帝)가 태어난 곳도 여기라 하지만, 여기를 방문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공자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취푸에는 소위 삼공(三孔)이라 불리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이 모여 있는데, 이 삼공 또한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았다. 삼공 모두를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은 한 사람에 150위안을 받았다. 3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다시 한번 중국의 비싼 문화재 입장료에 놀랬다. 15,000자로 이루어진 논어를 모두 외우면 공짜 입장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은근히 사람 열받게 한다.

 

공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에 대해 황제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곳이 바로 공묘였다. 한나라 시대부터 황제가 제사를 지냈다니 2천 년이 넘는 세월을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 것이다. 만인궁장(萬仞宮墻)이라 적힌 둥근 성벽 아래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연이어 나타났다. 공묘의 압권은 아무래도 대성전(大成殿)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1724년 옹정제가 재건했다고 하는데, 처마에는 청나라 황제들이 쓴 푸른 편액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이 대성전은 베이징의 태화전, 타이안 다이먀오(岱廟)의 천황전과 더불어 중국 3대 고건축으로 불린다고 한다. 공묘 구경을 마치고 공부로 이동했다.

 

 

 

 

 

 

 

 

 

 

 

 

 

 

 

 

 

 

 

 

 

 

Posted by 보리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justin 2015.04.21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처음에 공묘가 공자의 묘인줄 알았습니다. 공자 선생님은 유교 사상이 이 세상 많은 나라에 퍼진걸 아실까 궁금합니다.

 

우리에게 공자(孔子)가 누구인가? 공자의 사상은 유교 문화권에서 자란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우리가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를 방문한 것도 공자의 발자취를 되집어보기 위함이다. 저녁 7시가 지나 취푸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면서 차창으로 취푸 시내를 먼저 일견할 수 있었다. 짐을 부리고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섰다. 취푸가 한때 노()나라의 수도여서 그런지 우리 남대문과 비슷한 성문과 성곽이 보였다. 성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장 골목을 발견했다. 골목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란저우() 음식을 파는 식당을 골랐다. 회교권 음식임에도 맛은 대체적으로 훌륭했으나 술은 일체 팔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도 하지 않고 공묘(孔廟) 입구로 향했다. 아직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한산한 거리를 걸으며 모처럼 조용한 아침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공묘 입구에선 매일 아침 8시면 공연이 펼쳐진다고 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팔을 불며 걸어오더니 관원 차림의 남자가 공연 시작을 알린다. 분홍색 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한 바탕 춤을 추고 난 후에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깃발을 휘두르며 힘을 과시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출연해 공연을 펼치는데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다. 공연이 끝나자 우리는 아침을 먹으러 다시 시내로 향했다. 어떤 식당은 공자의 76대 손이 운영한다는 것을 광고하듯 버젓이 적어놓았다.

 

 

 

 

 

 

(사진취푸에 도착해 시장 골목에서 란저우식 요리로 저녁을 해결했다.

시안(西安) 서쪽에 자리잡은 란저우는 오래 전부터 실크로드 상의 교역 도시로 발전했다.

 

 

 

 

 

 

 

(사진숙소에서 공묘 입구로 걸어가면서 마주친 취푸의 아침 풍경

 

 

 

 

 

 

 (사진공묘 입구에서 매일 아침 8시면 펼쳐지는 공연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Posted by 보리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justin 2015.04.26 0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 동작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중천문을 지나면서 길이 상당히 가팔라졌다. 그만큼 계단의 각도가 급해진다는 이야기다. 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중국 사람들은 타이산 오르는 것을 등산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보통은 운동화 차림이었고 어떤 사람은 구두를 신고 오기도 했다. 산길 여기저기에 무슨 사원, 사당은 그리 많은지 들르는 곳마다 향을 사라, 돈내고 복을 빌어라며 온통 돈타령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길 양쪽으론 기념품 가게와 식당, 호텔들이 곳곳에 나타나 여기가 산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이 지나 남천문에 도착했다. 남천문을 지나니 천가가 나온다. 온통 상점과 식당, 호텔로 가득한 산상마을이었다. 계단을 따라 앞만 보고 올라오던 풍경이 일순 바뀌며 전망이 좋아졌다. 우리가 올라온 길이 한 줄기 하얀 선으로 보였다. 타이산 정상인 옥황정(玉皇頂)까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것은 등산이라고 하기보단 경사가 급한 계단을 끊임없이 오르는 극기훈련 같았다. 무려 7,412개의 계단을 걸어오르려니 비슷한 높이의 산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것 아닌가 싶었다. 땀은 꽤 났지만 그래도 무사히 끝까지 올랐다.

 

타이산의 정상석은 의외로 옥황전 앞에 세워져 있었다. 하얀 비석에 빨간 글씨로 1,545m라 높이가 적혀 있었다. 옥황상제를 모시는 도교 사원인 옥황전이 왜 타이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것일까? 정상석 앞에 섰지만 여기가 타이산 정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일출봉이 조망도 있어 정상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산은 곤돌라와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돌계단을 오르느라 고생한 무릎이 은근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곤돌라와 버스를 타는데 또 한 사람에 120위안을 내야 했다. 천외촌에서 버스를 내려 타이산 산행을 마쳤다.

 

타이산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현장이고 지질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타이산을 오른 내 느낌은 등산이라기보다는 그저 유원지를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시작하는 양사언의 시조만 아니었다면 직접 타이산 오를 명분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한 번 오르면 10 장수한다는 이야기도 관광 수입을 노린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 타이산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소득이라면 소득 아니겠는가.

 

 

 

 

 

 

 

 

 

 

 

 

 

 

 

 

 

 

 

 

Posted by 보리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justin 2015.05.06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산을 갔다와서 뜻깊었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하늘이 뿌옇고 특히 정상이 산같지가 않아 보통이었습니다.

    • 보리올 2015.05.07 0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산행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버킷 리스트에서 타이산을 지울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다시 가기는 어려울 것 같지 않냐?

 

타이산(泰山)은 중국 오악(五岳)에서도 으뜸으로 여기는 산으로 역대 황제들이 여기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했던 곳이다. 중국사람들이 평생 한 번 오르기를 염원한다는 곳이라 호기심도 일었지만, 이곳을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는 속설도 내심 믿고 싶었다. 출발은 다이먀오()에서 했다. 다이먀오는 타이산의 정상인 옥황봉과 남천문의 정남향에 위치하고 있는데,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치르기 전에 이곳 다이먀오에서 먼저 제례를 올린 곳이다. 황제라고 아무나 봉선의식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시황 이후 오직 72명의 황제만이 여기서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단다. 다이먀오는 황제들이 살던 황궁에 못지 않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천황전은 자금성의 태화전, 공자묘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이라 했다.

 

다이먀오를 나와 타이산으로 향했다. 처음엔 차량들이 오고가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른 아침부터 길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게들도 일찍 문을 열었다. 홍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타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타이산 입장료가 그리 싸지 않았다. 한 사람에 127위안을 받아 산을 오르는데도 2 5천원에 가까운 돈을 내야하는 셈이다. 돈을 내고역꾸역 들어오는 사람들 많았다. 그나마 외국인과 내국인을 차별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일천문에서 중천문에 이르는 구간은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았다. 길은 전구간에 걸쳐 돌로 놓여 있었다. 계단길이 좀 지루하긴 했지만 그리 힘들이지 않고 중천문에 이르렀다. 산 아래에서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여기서 곤돌라를 갈아타고 남천문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우리는 튼튼한 두 발을 믿기로 했다.

 

 

 

 

 

 

 

 

 

 

 

(사진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치뤘다는 다이먀오를 먼저 둘러 보았다.

 

 

 

 

 

 

 

 

(사진홍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타이산 산행은 돌길과 계단을 타고 올라야했다.

이름을 모두 기억하기 어려운 몇 군데 문을 지나 중천문에 닿았다.

 

Posted by 보리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justin 2015.04.30 0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만큼 아니지만 참 많은 문을 지나쳤습니다. 문득 모든 문들이 각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 보리올 2015.04.30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 문이 참 많았었지. 각각의 문이 어떤 의미를 지녔겠지만 그 모두를 모르고 지나쳤구나.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면 좀 달라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