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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21일차(베가 데 발카르세~트리아카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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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콩을 얹은 파스타로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알베르게가 소란스러워졌다. 옆방에 묵었던 아가씨 한 명이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뛰어나왔고 알베르게 오스피탈레로도 이곳저곳 분주히 움직였다. 간밤에 옆방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한 것이었다. 60대 후반의 노인네 한 명이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용변을 본다는 것이 그만 방 안에 있는 그 아가씨 배낭에다 두 차례나 쉬를 한 것이다. 경찰을 불러라, 둘이 합의를 해라 하며 알베르게가 한동안 시끄러웠다.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어수선한 가운데 먼저 알베르게를 떠났기 때문이다. 베가 데 발카르세(Vega de Valcarce)도 한 눈에 보기에 예쁜 마을 같아 보였지만 비가 내리는 탓에 좀 스산해 보였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다가 라스 에레리아스(Las Herrerias)를 지나면서 오솔길로 접어 들었다.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비를 맞으며 산을 오르는 기분은 사실 별로다. 사방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비구름이 그 풍경을 가리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오늘이 딱 그랬다. 마지막 산을 오르는데 비가 내리다니 이게 뭔 조화냐 싶었다. 좁은 오솔길엔 밤송이가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한해 열심히 영양분을 만들어 밤송이를 만들었건만 차에, 소에 그리고 사람에 밟혀 씨앗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밤나무의 심정을 생각하니 공연히 내 속이 탄다. 알이 실한 밤을 몇 십 개 골라 배낭에 넣었다. 어디 목이 좋은 곳이 나타나면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를 대신해 씨를 뿌려줄 생각이었다. 길엔 소똥 역시 무척 많았다. 소들의 왕래가 잦은 것을 보면 이 마을은 목축이 주요 생계 수단인 모양이다.

 

계속 오르막이 이어졌다. 해발 1,300m까지만 오르면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앞으로 이런 산악 지형은 나타나지 않는다. 레온 주의 마지막 마을 라 라구나(La Laguna)를 지났다. 어느 정도 고도를 높이자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했다. 촉촉하게 비에 젖은 가을 정취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능선을 따라 비구름이 춤을 추고 산기슭은 군데군데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날이 맑았더라면 꽤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을텐데 좀 아쉽다. 능선 위로 올라서 갈리시아(Galicia) 자치주의 루고(Lugo) 주로 들어섰다. 갈리시아 문장을 새겨넣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가 갈리시아 자치주에 있으니 이제 목적지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세운 첫 표지석에도 산티아고까지 151.5km가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산 꼭대기 부근에 있는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에 닿았다. 안개가 짙고 여름에도 눈이 온다는 곳인데 다행스럽게도 잠시 비가 그쳤다. 산타 마리아 성당은 깔끔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던 성배가 여기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의 진위는 나도 잘 모른다. 돌로 지은 집 외에도 둥근 초가 지붕을 얹은 파요싸(Palloza)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켈틱 전통의 파요싸에는 사람과 가축이 함께 기거하기도 했고 소시지나 햄을 훈제하기도 했단다. 순례길은 바로 하산하지 않고 비슷한 고도를 유지하며 오르내림을 계속해야 했다. 해발 1,270m의 산 로케 고개(Alto do San Roque)를 지나고 오스피탈(Hospital)이란 볼 것 하나 없는 마을도 지났다. 해발 1,335m의 포이오 고개(Alto do Poio)도 가볍게 넘었다. 그 후론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까지 긴 내리막 길이 시작됐다.

 

갈리시아의 전형적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완만한 구릉이 넘실대고 그 경사면에 조성한 푸른 초지와 목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가롭게 그 위를 거니는 소들도 보였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꼭 알프스의 초원 같다며 갈리시아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지만, 난 자연을 훼손한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속이 편하지 않았다. 생계가 최우선이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오후의 지루함이 덮쳐올 즈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며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빨리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비를 맞기 시작해 하루 종일 비를 맞았다. 오후 4시경에 트리아카스텔라에 도착해 알베르게를 찾느라 시간을 좀 허비했다. 공립 알베르게는 취사 시설은 없었지만 방은 4인실로 꾸며 아늑하고 깨끗했다. 이태리 친구와 한 방을 썼다.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가지 않고 빵과 사과, 삶은 계란에 와인으로 알베르게에서 대충 해결을 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라스 에레리아스 마을은 차분하면서도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라스 에레리아스를 지나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나타났다.

 

라 파바(La Faba)란 마을에서 만난 어느 시골집의 벽면 모습

 

 

 

 

어느 정도 고도를 높이자 비에 젖은 가운데도 가을 정취를 풍기는 산악 지형이 나타났다.

 

라 라구나 마을에서 초가 지붕을 얹은 건물 한 채를 발견했는데 그 용도는 잘모르겠다.

 

 

다시 산으로 오르는 중에 계곡 아래 자리잡은 마을 하나가 보였다.

 

 

능선 위에 올라 바라본 풍경. 풍경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더 넓은 지역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갈리시아 지치주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리는 표지석은 500m 간격으로 하나씩 세워져 있었다.

 

 

 

바람의 마을이란 별명을 가진 오 세브레이로에 올랐다. 파요사란 특이한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오 세브레이로를 내려서면서 잔잔한 풍경과 마주쳤다.

 

 

비를 맞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

 

산 로케 고개엔 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순례자 형상을 묘사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포이오 고개를 넘어 만난 조그만 성당 하나가 순례자에게 비를 피할 휴식처를 제공했다.

 

하산길에 갈리시아 지방의 전형적인 풍경을 만났다.

 

트리아카스텔라로 들기 직전에 만난 어느 마을의 성당 입구에 두 송이의 꽃이 꽂혀 있었다.

 

 

 

트리아카스텔라 마을의 모습. 산티아고 성당과 순례자상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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