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아나우 인근에 뉴질랜드가 자랑하는 밀포드 트랙과 루트번 트랙이 있다. 1908년 런던 스펙테이터(London Spectator)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 소개된 밀포드 트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표현을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 난 그 표현에 동조하고픈 마음이 없다. 세계 여행을 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쓰여진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문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매년 성수기엔 하루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3박 4일의 일정에 따라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여야 한다. 그에 비해 장쾌한 산악 풍경을 자랑하는 루트번 트랙은 일정이 자유로운 편이고 양방향 통행도 가능하다. 케플러 트랙은 밀포드 트랙과 루트번 트랙을 섞어 놓은 듯한 풍경이라 보면 된다. 일정 자체도 루트번처럼 통제가 그리 심하지 않아 좋았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강풍에 비가 내린다고 했다.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태양이 떠올라 내심 예보가 틀리기를 바랬다. 오늘이 케플러 트랙에서 산악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하이라이트 구간이기 때문이다. 8시 조금 넘어 럭스모어 산장을 출발했다. 산길이 넓고 뚜렷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은 바람이 좀 셌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산 아래로 테아나우 호수가 눈에 들어왔고 그 건너편으론 멀치슨 산맥(Murchison Mountains)이 버티고 있었다. 럭스모어 산(Mount Luxmore)으로 오르는 갈림길에 닿을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이 시속 80km가 넘는 바람에 실려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능선을 걸을 때는 바람에 밀려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배낭 무게까지 합하면 100kg이 넘을 텐데도 속수무책으로 밀린다. 가끔 돌풍이 몸을 때려 바닥에 주저앉거나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럭스모어 정상에 가려던 계획도 포기해야만 했다. 배낭 커버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산에서 강풍을 처음 맞는 것도 아닌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잠시라도 바람과 비를 피하려 포레스트 번(Forest Burn) 쉘터와 행잉 밸리(Hanging Valley) 쉘터를 기웃거렸지만 이미 만원이라 그냥 지나쳐야 했다. 쉬지 않고 걸은 후에야 비치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섰다. 비는 내렸지만 바람과는 작별할 수 있었다. 5시간 산행을 하고 나서야 아이리스 번 산장(Iris Burn Hut)에 도착했다. 오늘 걸은 거리는 14.6km. 침상부터 잡고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산장이 소란해졌다. 오후 들어 비가 그치고 햇살이 들면서 숲과 초원이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아이리스 번 폭포로 나들이를 갔다. 규모가 큰 폭포는 아니었지만 오고 가는 길이 예뻤다. 저녁 무렵엔 케아(Kea) 몇 마리가 산장을 찾았다. 뉴질랜드 산악 지역에 서식하는 앵무새로 배낭 지퍼를 열 정도로 영리한 녀석들이다. 관리가 허술한 배낭을 찾아 저녁 식사를 나온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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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스모어 산장 근처에서 스토우트(Stoat)를 잡기 위한 덫을 발견했다.
아침 날씨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산행을 시작하니 강풍과 비가 몰려왔다.
누런 터석으로 뒤덮인 산길이 약간은 황량해 보였다.
산길 아래로 테아나우 호수와 멀치슨 산맥이 보였다.
해발 1,472m의 럭스모어 산 정상
초원 지대와 능선을 지나 럭스모어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바람이 너무 거세 30분이면 왕복한다는 럭스모어 정상을 포기했다.
포레스트 번 쉘터엔 이미 대피 중인 사람으로 만원이었다.
두 개 쉘터를 지나고 빗방울이 가늘어지자 시선에 여유가 생겼다. 무지개도 나타나 눈을 즐겁게 했다.
아이리스 번 산장에 짐을 풀고 폭포를 다녀왔다.
아이리스 번 산장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되는 레인저의 헛톡
알파인 앵무새인 케아는 영리하기 짝이 없어 방치된 배낭을 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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