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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1일차(부르고스~온타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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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비가 내렸다. 전날 수퍼마켓을 찾지 못해 빵집에서 산 빵과 햄으로 아침을 대충 때웠다. 우의를 입고 밖으로 나섰다. 빗방울이 굵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무슨 비석 세 개가 희미하게 보여 다가갔더니 엘 시드와 관련된 유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엘 시드로 알려진 로드리고 디아쓰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가 여기 출신이었고, 그의 무덤이 대성당 안에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세 개의 비석은 솔라 델 시드(Solar del Cid)라 불렸는데, 호세 코르테스(Jose Cortes)1784년에 엘 시드의 집이 있던 곳에 세운 건축물을 의미했다. 부르고스 대학교를 지나면서 구름 사이로 어설프게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볼 수 있었다. 해가 떠오르자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어느 순간 비가 그치고 말았다.

 

라베(Rabe)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다 되어간다. 종소리를 듣고는 사람들이 하나둘 성당으로 몰려 들었다. 미사가 곧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마을을 벗어나 오르막 경사를 오르니 평평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본격적으로 메세타(Meseta)가 시작되는 것이다. 해발 800m에서 1,000m에 이르는 구릉 지대에 끝없이 밀밭이 펼쳐지는 곳이 메세타지만 지금은 벌판이 텅 비어 있었다. 여름이나 겨울에는 혹독한 기후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부르고스에서 레온(Leon)에 이르는 구간을 건너뛰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늦가을이고 하늘엔 구름이 가득해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풍경이 단조로운 것이 흠이었지만 푸른 하늘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것만 해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메세타 지역이라고 완전 평평한 것은 아니었다. 완만한 구릉지대에 걸맞게 오르막도, 내리막도 나타났다. 언덕에 올라서니 저 아래 자리잡은 오르니요스(Hornillos)가 눈에 들어왔다. 내리막 길을 지나 들판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개미새끼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오르니요스에 있는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샀다. 마을로 오다가 만난 한국인 젊은이와 함께 나눠 먹었다. 이 친구는 광고회사에 다니다 사직을 하고 조만간 창업을 한다는 3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인상도 좋았고 실제 성격도 싹싹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니요스에서 온타나스(Hontanas)에 이르는 11km를 함께 걸었다. 날씨도 점점 좋아져 푸른 하늘이 영역을 크게 넓히고 있었다.

 

아로요 산 볼(Arroyo San Bol)에 천연샘이 있다고 들어 유심히 찾아보았지만 마을 자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샘물에 발을 담그면 순례 중에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다는 속설이 있다고 해서 은근 기대하고 왔는데 말이다. 사실 어느 허름한 건물 벽에 붉은 페인트로 산 볼이라 적힌 것은 보았지만 그것이 마을을 지칭하는 것인 줄은 몰랐다. 산 볼엔 실제 마을이 없었다. 알베르게로 쓰는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였다. 예전에는 여기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16세기 초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전염병이 창궐했거나 아니면 여기 살았던 유대인들이 추방되면서 마을이 없어졌을 것이라 추정만 할 뿐이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온타나스가 보이지 않았다. 언덕에서 내리막으로 들어서니 그 아래에 마을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무니시팔 알베르게에 들었다. 관리를 맡고 있는 모녀가 둘다 불친절했다. 부엌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시설은 엉망이었다. 사람이 적은 이유를 알만했다. 순례 첫날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난 미국 한인 자매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덴버에서 온 언니는 잘 걷는 편이지만 LA 동생은 무척 힘들어 해서 버스를 타고 앞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언니되는 이영애 선생이 라면에 감자, 양파를 넣고 찌개를 끓이고 밥을 해서 넷이서 함께 저녁으로 먹었다. 나도 배낭에 고히 모셔둔 고추장을 꺼내고 와인을 한 병 샀다. 남은 쌀로 밥을 해서 다음 날 먹을 누룽지를 만들었다.

 

엘 시드의 집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솔라 델 시드

 

부르고스 대학교를 지나는데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면서 비도 그쳤다.

 

무슨 의미를 지닌 조형물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부르고스를 벗어났다.

 

다른 성당과는 형태나 색깔이 달라 내 시선을 끌었다.

 

고속도로 위로 난 도로를 걸어 고속도로를 건넜다. 고속도로는 너무나 한산했다.

 

 

순례자 병원이 있던 곳에 세운 돌 십자가를 지나 타르다호스(Tardajos) 마을로 들어섰다.

 

 

 

라베 마을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어느 집 벽면에 쓰여진 낙서가 눈길을 끌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리는 내용 옆에 가스 시추공을 반대한다는 격문도 적어 놓았다.

 

아담한 누에스트라 세뇨라 모나스테리오 성당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메세타가 시작되었다. 고원지대에 드넓은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르니요스로 향하는 순례길이 벌판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고 있다.

 

 

시골의 조그만 마을 오르니요스를 지났다. 화분을 걸어놓은 모습에서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오르니요스의 산 로만 성당 앞 광장에는 수탉 조각을 올려놓은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지나쳤다.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구입한 오르니요스 가게. 산티아고까지 469km 남았다 적혀 있었다.

벽면에 붙여놓은 각국 화폐 가운데 우리 돈 1,000원짜리 지폐도 있었다.

 

 

오후 들어 날씨가 좋아지면서 메세타 지역의 풍경이 살아나고 있었다.

 

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인연으로 같이 점심도 먹고 온타나스까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 젊은이 장석민씨.

 

 

하루 묵을 알베르게가 있는 온타나스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서 밥과 찌개로 넷이서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 날 먹을 누룽지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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