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친구들은 한라산을 오른다고 먼저 떠나고 최정숙 회장과 둘만 남았다. 밴쿠버 산악계의 대모이었던 이 양반은 몇 년 전에 무릎 수술을 받아 아직 걸음거리가 자유롭지 않다. 1 6개월에 걸쳐 밴쿠버에 있는 쉬운 트레일을 걸으며 재활 훈련을 해왔다. 나도 건강에 문제가 있어 밴쿠버에 머무르고 있던 차라 내가 주도적으로 훈련 계획을 짰다. 그 결과를 이 3코스를 통해서 점검해 보고 싶었다. 평소에 걷던 것보다 약간 과부하를 걸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된다. 이 코스는 다른 코스에 비해 거리가 멀었다. 일부러 표지판에 적힌 내용, 22km 거리에 6~7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도중에 더 이상 못 가겠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온평포구엔 아침 식사를 할만한 곳이 없어 아침을 거르고 출발했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 문을 열지 않은 것이다. 동네를 벗어나 길가에 세워진 돌하르방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코끝이 싸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신산리 마을을 지나는데 마침 창고 문을 열던 노인이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라 하더니 귤을 한 주먹씩 주는 것이 아닌가. 올레길을 걷는다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길손들이 귀찮을텐데 오히려 이런 친절을 베풀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하루의 시작이 즐거워졌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길을 걸으면서 하나씩 까먹었다. 그런대로 아침 대용이 되었다.  

 

억새가 우거진 독자봉을 올랐다. 바람이 드세게 불어와 억새가 잠시도 그냥 있지를 못한다. 멀리 육중한 산괴를 드러낸 한라산을 배경으로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었다. 무밭도 꽤 많이 지나쳤다. 제주도에서 이렇게 많은 무가 생산되는지는 여기 와서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성한 무가 뿌리 채 뽑혀 밭에 뒹글고 있는 것이었다. 저 정도면 상품성도 있어 보이는데 그냥 버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무가 썩어 거름이 되라는 의미일까? 밭으로 들어가 튼실한 무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무를 뽑은 것이 아니라 땅에 널브러진 것을 주운 것이다. 칼로 껍질을 벗겨 먹으니 물기도 많고 맛도 괜찮았다. 귤에 이어 무도 아침 대용으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삼달리에 도착해 김영갑갤러리 <두모악>부터 들렀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주로 찍은 이 양반 이름은 익히 들은 바 있지만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예전에 학교로 쓰던 공간을 갤러리도 꾸며 놓았다. 아무나 쉽게 잡을 수 없는 제주도 비경을 감상하곤 갤러리를 나와 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국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신천리 방목지에선 노란 감귤 껍질을 말리고 있었다. 규모가 엄청났다. 이것을 말려서 뭐에 쓸까 의견이 분분했다. 거기서 일하는 분에게 직접 물어 보았더니 돼지 사료로 쓴다고 한다. 이렇게 오렌지 껍질을 펼쳐놓으니 또 하나의 제주도 풍경이 되었다. 무슨 수산이라 이름 붙인 활어 양식장 몇 개를 지나 해질녘이 되어서야 표선 해비치해변에 도착했다.

 

무려 10시간을 걸어 표선에 도착했을 때가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릎 수술 이후에 20km를 넘게 걸은 것이 처음이었던 최정숙 회장은 오늘 일정을 소화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을 텐데도 힘들단 말 한 마디 없이 끝까지 구간을 마쳤다. 내일 모레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말이다. 말이 사라진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는데 대부분 식당이 흑돼지를 메뉴로 했다. 몇 군데를 돌다가 어떤 식당으로 들어가 성게미역국과 고등어구이를 시켰다.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 고등어구이 1인분에 18,000원을 받는다. 아무 소리 못하고 지불은 했지만 현지 식당의 바가지에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여기서 자려던 생각을 바꿔 제주로 나가 아이들이 묵는 숙소로 들어갔다.

 

올레길 세 구간을 걷고 돌아오면서 과연 올레길이 소문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글에선 도보 여행의 낭만이 가득했지만 정작 내가 직접 걷고 난 느낌으론 올레길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물론 지난 3일 동안 오름도 올랐고 해안길도 걸었다. 어촌 마을의 골목길도, 밭과 밭 사이로 난 돌담길도 걸었다. 이국적인 풍경도 꽤 만났다. 하지만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 뭔가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길과 길을 무리하게 연결한 것 같기도 했고,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이 많은 점,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대로를 걷는 것도 속으론 불편했다. 뻔한 음식에 바가지를 씌우는 식당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나머지 구간을 걸으러 다시 제주를 찾을 것인지는 현재로선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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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리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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