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한라산을 올랐던 친구들과 헤어져 제주도에 홀로 남았다. 모처럼 제주까지 온 김에 제주 올레길을 한 구간만이라도 걸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올레길이 처음 열렸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2007년 캐나다에서였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장거리 트레일이 생겼다는 소식이 반가웠고 어떻게 연결해서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내심 궁금증이 일기도 했었다. 서귀포에 들러 오희준 추모공원을 잠시 방문한 후 표선에 사는 후배를 만났다. 이 친구는 제주산악구조대를 이끌고 있는데 2014년에는 대한민국 산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주 동일주 노선인 701번 버스를 타고 성산포로 이동해 하룻밤 묵고는 그 다음 날 일출을 보러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일출은 기대처럼 멋진 장면을 연출하진 않았다. 구름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 햇살에 만족해야만 했다.
내가 오늘 걷는 구간은 올레길 1코스다. 가장 먼저 열린 길이라 1코스란 명예를 얻었다. 비록 하루 걷는 일정이지만 가능하면 맨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올레길은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착상을 얻어 만들었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한 방향으로 걷지만, 제주 올레길은 해안선을 따라 오름과 마을을 지나면서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다. 올레란 말도 잘 선택한 것 같았다. 거리에서 집으로 연결된 긴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 이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트레일 이름이 되었다. 동일주 버스에서 내려 시흥초등학교 옆으로 난 소로 입구에 섰다. 1코스를 알리는 표지판과 느릿느릿 걷는 조랑말을 표현한 간세가 이방인을 맞는다. 오늘 15km 거리에 5~6시간을 걸어야 한다고 표지판은 친절히 알려주고 있었다.
소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밭과 밭 사이를 나눈 돌담길을 걷는다. 밭에 숨어있는 무덤도 돌로 경계를 쌓았다. 현무암이 지천인 제주도를 자랑하는 듯 했다. 금세 제주올레 안내소에 닿았다. 안에 잠시 들렀더니 코스 설명이나 안내보다는 제주올레 패스포트와 기념품 팔기에 더 열심인 것 같았다. 바로 말미오름으로 오르는 구간이 나타났다. 표지판에는 두산봉이라 소개하고 있었다. 이 오름에 서니 성산일출봉이 한 눈에 보이고 바다 건너편으론 우도가 빤히 보였다. 하늘에서 바다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장관이었다. 성산일출봉과 그 앞에 자리잡은 마을, 초록색 논밭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제주 오름에 올라야 볼 수 있는 특유의 풍경이 이런 것 아닐까 싶었다.
알오름을 오르는 구간에서 모녀로 보이는 두 여자를 만났다. 두 모녀의 올레길 여행이 정겹고 아름다워 보였다. 카메라 하나로 서로의 사진만 찍어주기에 둘을 함께 찍어줄까 물었다가 단칼에 퇴짜를 맞았다. 혼자 온 내가 의심스러웠는지 경계하는 눈치가 심해 먼저 하산을 서둘렀다. 알오름에서 내려와 마을을 만났다. 오름 두 개가 1코스 오르막의 전부였고 나머진 마을을 가로지르고 해변을 따라 걸었다. 1132번 도로를 건너고 예쁜 색깔로 벽을 칠한 종달리를 지났다. 한자어 이름일텐데 종달새가 연상되어 느낌이 좋았다. ‘소심한 책방’에 들러 커피 한 잔 하면서 책을 뒤적이다가 딸에게 선물할 책도 한 권 샀다. 해안도로를 걸을 때는 줄에 매달아 오징어를 말리는 장면도 목격했다. 바닷가 마을의 소소한 일상이 길손의 눈을 즐겁게 했다.
고깃배들이 즐비한 성산항을 둘러보고는 ‘오조해녀의 집’에서 전복죽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죽 한 그릇에 11,000원을 받아 제주도 물가에 좀 놀랬다. 성산일출봉이 점점 가까워졌다. 성산일출봉은 1코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랜드마크였다. 해수면에서 불과 179m 높이라는데도 하늘 높이 솟은 느낌이 들었다. 성산일출봉은 빼어난 경관과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이어 세계지질공원으로도 등재가 되었다 한다. 마침내 광치기해변에 도착함으로써 1코스 구간을 마무리했다. 사진 찍으며 유유자적 걷다 보니 6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문득 오전에 들렀던 제주올레 안내소 유리창에 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놀멍, 쉬멍, 걸으멍.’혼자서 천천히 걷는 내 모습에 딱 어울리는 제주도식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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