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들어가 있던 어느 날, 고등학교 동기인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학 산악부 출신인 이 친구는 대전에서 자기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요일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산에 가겠다고 작심하곤 열심히 산을 찾고 있었다. 몇몇 가까운 친구들과 지리산을 가려고 하는데 나도 참여하란다. 전에 어느 선배가 이야기하길, 함께 가자고 불러주는 친구가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란다. 두 말 않고 따라가겠다 했다. 등산용품을 대충 챙겨 배낭을 꾸렸다.
겹겹이 펼쳐진 산자락들이 우리 눈 아래 펼쳐진다. 이렇게 부드럽게 겹쳐 흐르는 산자락은 우리 나라에서나 접할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험봉이 많은 캐나다에서는 보기 힘들다. 대피소 마당에 있는 빨간 우체통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편지를 넣으면 우체부가 수거해가는지, 편지는 정말 전달이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산 아래 멋진 풍경을 앞에 두고 대피소 벤치에서 김밥과 사발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만한 경치를 가진 식당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누군가 배낭에 숨겨온 막걸리를 꺼내 들어 더더욱 흥을 돋군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리산을 찾은 것이 수십 번은 되지만 이렇게 맑은 날 멋진 풍경을 보여준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산 특유의 날씨답게 늘 비나 눈에 젖어 추웠던 기억이 많은 곳이다. 행복한 마음은 발걸음도 가볍게 한다. 그리 힘든지도 모른 채 드디어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여기에 서면 늘 가슴이 설렌다.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서있는 대장군의 기분이 과연 이런 것일까.
이 천왕봉 정상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이 춥고 외진 곳에서 홀로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안스러운 마음이 드는 반면, 이곳까지도 시위 현장으로 쓰는 것에 대해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가슴에 붙인 대자보에는 지리산에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한다고 적혀 있었다. 나도 지리산에 케이블카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여기보다는 지리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기관의 정문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