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 밝았다. 마지막 결전을 앞둔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새벽 3 30분에 기상을 했다. 밖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지만 일찍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로지 식당은 벌써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삶은 계란과 삶은 감자, 토스트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다. 대부분 식욕이 없어 드는둥 마는둥 음식을 건들이다 만다. 나만 혼자 식욕이 있다고 시건방을 떨 수가 없어 계란과 감자를 봉투에 담아 배낭에 넣었다. 말을 타고 토롱 라로 오를 두 사람은 5 30분 출발이라 로지에 남겨두고 우리만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 4 15분에 로지를 나섰다.  

 

이 지역은 묘하게도 새벽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춥고 세찬 골바람이 불어오면 토롱 라를 오르는데 엄청 애를 먹기 때문에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신기하게도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적막강산 속에서 토롱 라쪽으로 헤드랜턴 불빛이 쭉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검은 산괴를 감아오르는 커다란 뱀의 형상 같았다. 하늘엔 반달이 떠서 헤드랜턴없이도 길을 식별할 수는 있었다. 고도계를 수시로 확인해가며 고도 5,000m 지점에서 일행들을 불러세웠다. 달랑 세 명뿐이었지만 지금까지 해오던대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나를 제외하곤 모두가 5,000m를 처음 경험하는 순간인데도 표정은 도통 밝지 않았다. 기념 촬영도 그들에겐 성가신 듯 보였다.

 

산자락이 점점 밝아오더니 그 위를 장식한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나타났다. 구름만 찍어도 아름다운 사진이 될 것 같았다. 토롱 라에 가까워질수록 추위를 동반한 강풍이 점점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의 가장 큰 장애물인 토롱 라가 어찌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있겠는가. 토롱 라를 20여분 남겨놓은 지점에서 말을 타고 올라온 두 분이 우리를 추월해 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엄청난 추위에 떨었던 기색이 역력하다. 하이캠프를 출발해 네 시간을 쉬지 않고 걸어 해발 5,416m의 토롱 라에 닿았다. 너무 춥고 다리가 무거워 토롱 라에 오른 희열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빨리 추운 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토롱 라 정상엔 찻집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을 불러 찻집으로 들어섰다. 뜨거운 차 한 잔으로 추위를 녹이는 수밖에 없었다. 배낭 안에 있는 계란이나 감자를 먹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연히 짐만 만든 셈이다. 찻집은 사람들로 너무나 붐볐다. 추위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려고 해서 오래 앉아있기가 미안했다. 추위와 고산병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하산이 최선의 방법이다. 우리도 토롱 라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는 하산을 서둘렀다. 토롱 라의 악명높은 강풍이 하산에 나선 우리의 등을 때린다. 이러다가 바람에 밀려 앞으로 고꾸라질 판이다. 새벽에 출발하지 않았더라면 이 바람과 하루종일 씨름했을 지도 모르겠다.  

 

제각각 컨디션에 따라 하산 속도가 달랐다. 최정숙 회장이 숨이 가프다며 자꾸 뒤로 처진다. 도저히 걸어 내려갈 수가 없으니 말을 불러 달라고 해서 사람을 페디로 먼저 내려보냈다. 하지만 그 마을엔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뒤에서 부축하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급경사를 내려와 페디에서 점심을 먹었다. 묵티나트까지는 여기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다. 길이 무척 편해졌다. 바람도 잦아들었다. 묵티나트는 힌두교에서도, 티벳 불교에서도 성지라 불리는 곳이라 일년 내내 성지순례를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묵티나트를 유명하게 만든 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티벳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하는 특이한 절이었다. 군인이 순직했는지 수십 명의 군인들이 몰려와 추모제를 지내고 있었다.   

 

묵티나트의 밥 말리(Bob Marley) 호텔에 투숙을 했다. 호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전에 묵었던 로지와는 격이 달랐다. 우선 뜨거운 물이 나와 샤워도 할 수 있었고 고장이 나긴 했지만 좌변기도 갖추고 있었다. 제법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를 풍기는 식당에서 만찬을 즐겼다. 정말 만찬이라 부를만 했다. 이 식당의 요리사가 호주 시드니에서 15년 경력을 쌓은 후에 이곳에다 식당을 열었다는 거창한 소개도 있었다. 특별히 치킨 시들러를 시켰다.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과는 맛에서, 가격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토롱 라를 무사히 넘은 안도감에 다들 자축하는 기분으로 치킨 시들러를 맛보았다. 우리가 치킨 시들러 먹는 모습을 눈으로만 봐야 하는 두 스님에겐 좀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조촐한 음식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도 히말라야 트레킹의 묘미 아니겠는가. 그 동안 고산병으로 고생이 많았던 사람들 얼굴에서 안도감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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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치앤치즈 2016.08.10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안나푸르나 등반하셨군요. 정말 특별한 추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보리올 2016.08.10 1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솔직히 이건 안나푸르나 등반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유명한 트레킹 코스를 돈 것뿐이지요. 그래도 5,416m의 토롱 라를 넘어야 했기에 몸이 좀 고달팠던 기억이 납니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구간 중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다. 여전히 스님 두 분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누룽지는 조금씩 드셔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야크 카르카의 음식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고도를 높일수록 물가가 오르는 것은 히말라야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라 나 또한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의 배짱 장사는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가 부족한 상황을 이용해 트레커들 주머니를 최대한 털겠다 작정하고 나선 것 같았다. 난생 처음으로 끓인 물 한 병에 220루피란 돈을 지불했다.

 

계곡을 따라 꾸준히 걸은 끝에 해발 4,540m의 토롱 페디(Thorong Phedi)에 도착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붐볐다. 점심으로 라면이나 끓일까 했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더군다나 일행들 대부분이 고소 증세로 식욕을 잃어 점심을 건너뛰어도 아무 불평이 없었다. 내친 김에 하이캠프까지 오르기로 했다. 원래는 토롱 페디에서 하루를 묵으려 했지만 오늘 조금 더 걸어두면 내일 토롱 라를 오르는데 그만큼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고도가 조금이라도 낮을 때 더 걸어두자는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다. 경사가 꽤나 심한 오르막을 두 시간 더 걸어야 했다. 일행들 걷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하이캠프로 오르는 지현 스님의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스무 걸음을 내딛고 제 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하라고 주문했지만 한 번에 스무 걸음도 힘들어한다. 이런 상태로 내일 토롱 라를 오를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법민 스님은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어 다행이었다. 여태까지 별 탈 없이 잘 걷던 이진우 선배가 갑작스레 얼굴이 퉁퉁 붓고 행동도 무척 느려졌다. 최정숙 회장도 숨이 가프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고도를 높이면서 새로운 상황이 연달아 발생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내일만 잘 버티면 되는데 역시 토롱 라가 복병이다. 그런데도 히말라야가 초행인 김우인 여사만 고소 적응에 별 어려움없이 잘 걷는다.

 

오후 3시가 가까워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하이캠프에는 규모가 엄청 큰 로지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가장 뒤에 처진 사람을 챙기며 오다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도착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허기가 져서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카고백에서 버너와 코펠을 꺼내 급히 떡라면을 끓였다. 고산병 증세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 옆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얼마나 얄미운 짓인지 잘 알지만 어쨌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나. 로지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대단했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험봉들이 안나푸르나 연봉을 에워싸고 있었다. 로지에서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봉우리가 하나 있어 카메라를 들고 혼자 올랐다. 꼭대기에는 제법 큰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 서서 어둠이 내려앉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 보았다.  

 

트레커, 가이드, 포터들까지 모두 들어와 식당은 완전 만원이었다. 바깥은 날씨가 추워 우모복으로 완전 무장을 해야 했지만, 식당 안은 사람들 열기로 그리 춥지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못하겠다 하는 사람도 있고, 식당에 나오긴 했지만 수저를 들지 못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군대식으로 정리하면 총원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전사, 두 명은 중상, 한 명은 경상,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멀쩡한 편이었다. 오늘 밤이 최대 고비다. 오늘 밤만 잘 버티면 내일 토롱 라를 넘기 때문에 고산병 걱정은 사라진다. 그런데 토롱 라까지 걸어 오르는 것이 무리라고 스스로 판단해 말을 타고 가겠다는 사람이 나왔다. 로지에 물어보았더니 토롱 라까지는 100, 묵티나트(Muktinath)까지는 200불을 달란다. 일단은 토롱 라까지 가는 것으로 해서 말 한 필을 예약했다. 나중에 다른 한 명도 추가로 말을 예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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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쉬었다고 몸 상태가 금방 달라지진 않았다. 그래도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 데는 도움이 된 듯 했다. 하루를 쉬었으니 힘을 내 오르자고 일행들을 격려했다. 마낭을 출발해 야크 카르카(Yak Kharka)로 향한다. 카르카란 목동들이 머물며 가축을 치던 방목지로 보면 된다. 예전에는 여름철에만 목동들이 머물던 곳이었는데, 트레커들이 밀려들면서 여기에 로지들이 들어선 것이다. 그렇지만 숙박시설이 그리 많진 않은 듯 했다. 그래서 껄빌이 새벽 5시 반에 카고백 하나를 들처메고 먼저 출발하였다. 그곳은 하루 세 끼를 로지에서 먹어야만 방을 준다고 한다. 방값을 흥정하기는 커녕 로지 주인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거 완전히 배짱 장사다.

 

마낭을 벗어나자, 부드러운 아침 햇살에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올라간다. 마음속 걱정을 한 순간에 잊게 만든 평온한 마을 풍경이었다. 어디에서 이 많은 트레커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사람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리 일행의 속도가 너무 느려 모두들 우리를 추월해 갔다. 그들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메마른 땅에선 먼지가 폴폴 일어났다. 뒤에서 그 먼지를 들이켜야 하는 신세에 짜증이 난다. 더구나 앞에서 먼지가 일면 나도 모르게 숨을 참다가 머리가 띵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빨리 이 구간을 벗어나는 길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오늘 운행거리는 천천히 걸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5시간이나 걸렸다. 야크 카르카가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서 해발고도 4,000m를 통과했다. 손가락 네 개를 펼쳐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최정숙 회장과 나를 제외하곤 다들 처음 접해보는 고도라 하이파이브로 서로를 축하해줬다.

  

정오를 넘어 야크 카르카에 도착했다. 껄빌이 잡아놓은 로지에서 점심을 시켜 먹었다. 딱히 할일이 없었다. 모두들 낮잠을 자려는 눈치라 난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뒷산에 올랐다. 야크 카르카란 지명에 걸맞게 야크 몇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계곡 건너편에도 야크 몇 마리가 위험스런 곡예를 벌이며 벼랑을 타고 있었다. 어린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어미도 있었다. 부드러운 빛을 받으며 조용히 버티고 선 안나푸르나 연봉과 강가푸르나를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마을로 내려왔다. 시간이 왜 이리 더디 흐르는지 모르겠다. 마음껏 여유를 부리는데도 시간은 오히려 더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다. 방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책을 들었다. 책은 역시 훌륭한 수면제였다. 나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스님 두 분이 저녁 식사를 마다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지금까지는 식사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거 큰 일이다. 해발 4,000m를 넘기면서 고소 증세가 더 악화된 모양이다. 얼마 남지 않은 누룽지라도 끓여 드시라고 방으로 넣어 드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지만 저녁 7시 반이 되자 모두들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 긴긴 밤을 또 어찌 보내야 한단 말인가. 잠은 오지 않고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이진우 선배로부터 중국 근대사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 양반은 언제 중국에 대해 이리 깊게 공부를 했는지 손문과 장개석, 송미령에 얽힌 이야기를 한없이 이어간다. 덕분에 밤이 무척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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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적응을 위한 예비일이다. 모처럼 늦잠을 잤다.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7시 아침 식사, 8시 출발로 하던 일정을 두 시간 늦추었더니 엄청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두 분 스님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웬만하면 숙소에서 쉬라고 했더니 고소 적응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한다. 포터 중에 가장 어린 리다가 오늘따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친구는 올해 15살이다. 우리로 치면 중학생인 셈인데 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우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늘 웃는 얼굴이라 일행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트레킹 초기부터 기침을 콜록콜록 해대더니 어제는 열이  끓었다. 스님들이 아침, 저녁으로 감기약을 먹이며 이 친구 상태를 체크한다.  

 

강가푸르나 호수를 지나 전망대까지 오르는 코스와 그 반대편에 있는 프라켄(Praken) 곰파까지 오르는 코스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프라켄 곰파를 택했다. 안나푸르나 산군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엔 곰파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왕복 4시간 걸린다니 소요시간도 적당했다. 포터들은 숙소에서 쉬도록 하고 우리만 길을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 급경사 오르막을 어느 정도 치고 올랐더니 조망이 좋아진다. 왼쪽부터 안나푸르나 2, 4, 3봉이 차례로 보이고 그 오른편에는 강가푸르나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강가푸르나에서 생성된 빙하가 길게 아래로 뻗어 있었고, 그 아래에 빙하가 녹은 물이 모여 에메랄드빛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호수가 많지 않은 히말라야에서 이렇게 큰 호수를 보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라 할만했다.

  

강가푸르나 호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틸리초(Tilicho) 호수에 닿는다. 그쪽으로 가도 결국은 좀솜에 닿지만 그 코스엔 로지가 없어 텐트를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그 코스를 눈으로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프라켄 곰파로 오르는 길은 꽤나 가팔랐다. 해발 3,900m에 있는 곰파까지 가려면 400m 높이를 단숨에 치고 올라야 한다. 그리 쉽지는 않았다. 풍경도 처음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곰파 아래에 세워진 불탑 근처에서 점심을 준비했다. 미리 씻어온 잡곡을 코펠에 넣고 버너에 불을 붙였는데 고도가 높은 탓인지 잘 익지를 않는다. 네팔 요리사들이 압력밥솥을 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금 설익긴 했지만 우리 입맛에 맞는 밥이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다른 팀을 수행했던 네팔인들이 절 안으로 들어가기에 나도 덩달아 따라갔다. 나이 지긋한 라마승 한 분이 방문객을 맞아 축복을 내려준다. 사진 몇 장 찍으려다 공짜로 차 한 잔 얻어 마신 죄로 스님 앞에 앉게 되었다. 불에 구운 곡식 몇 알과 노란색 물을 손바닥에 따라주며 먹으란다. 그리곤 내 머리에 경전을 대고 염불을 외우며 축원을 해준다. 불자도 아닌 사람에게 이런 황송할 데가 있나. 하지만 그 축원 의식은 공짜가 아니었다. 노승은 옆에 있는 비닐 봉지에서 가는 실로 만든 목걸이를 꺼내 내게 걸어주더니 손을 벌린다. 성의껏 100루피를 시주했다. 한데 이번에는 다른 봉지에서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걸이를 꺼내더니 500루피를 달라고 한다. 정중히 사양하곤 밖으로 나왔다.

 

마낭으로 돌아와 이메일 확인한다고 인터넷 카페를 찾았다. 차메에 비해 여기는 고도가 좀더 높다고 1분에 20루피를 받는다. 한 시간을 사용하면 2만원이 넘는 금액이다. 이제부터 인터넷 사용은 삼가야겠다. 저녁을 먹고 산책에 나섰다. 카페에서 커피나 한 잔 하자고 일행들을 데리고 나선 길이었다. 난로에 장작을 집어넣고 그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 꽃으로 시간을 보냈다. 저녁 7시면 달리 할 일이 없어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오늘은 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로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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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입맛을 잃고 누룽지만 찾는 사람들이 늘어 내심 걱정이 앞선다. 일행들 걷는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고소 적응을 위해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고소에 몸이 점점 힘들어지는 모양이다. 물을 많이 마셔라, 천천히 걸어라 다시 한번 주문을 했다. 토롱 라(Thorong La)까진 며칠 더 고생을 해야 하는데 그 때까지 다들 아무 일 없이 버텨주어야 할텐데……. 피상을 벗어나자 길가에 추모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거기엔 우리 나라 영남대 산악부의 추모 동판이 있었다. 1989년 안나푸르나 2봉 원정시 대원 두 명이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훔데(Humde)가 멀리 내려다 보이는 날망에 섰다. 마을을 따라 곧게 뻗은 하얀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혹시 저것이 공항 활주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훔데에 공항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도착해서야 그것이 공항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그만 관제탑도 세워져 있었다. 1주일에 두 편의 비행기가 포카라로 연결된다 했다. 우리 일행 중에 어느 누가 도저히 토롱 라를 넘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비행기로 돌아서야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또 한 군데의 검문소를 통과했다.    

 

안나푸르나 지역은 티벳과 접경을 이루는만큼 티벳인들이 많이 모여 산다. 길을 걸으며 티벳 불교의 유적 또한 많이 만난다. 그들의 삶이 결코 종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스님 두 분이 고소 증세도 무척 힘들어 한다. 두통에다 속까지 메슥거리는 증상까지 나타났다.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고산병 증세다. 몸이 힘들면 자주 쉬는 게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 아니던가. 예정보다 일찍 점심 식사를 하자고 일행들을 불러 세웠다. 안나푸르나 3봉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나푸르나 2봉과 4봉을 거쳐 3봉까지 왔으니 그래도 많이 온 셈이다. 식당 한 켠엔 빛바랜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우리네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길가에 얼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자락 폭포에도 하얀 얼음이 매달려 있었다.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아니겠는가. 앞으론 보온에도 신경을 써야 할 판이다. 뭉지(Mungji)란 마을은 안나푸르나 연봉들을 보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안나푸르나 2봉과 3, 4봉이 모두 한 눈에 보인다. 그 동안 2봉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던 4봉까지 뚜렷히 보였다. 브라카(Braka)에 있는 곰파는 규모가 대단했다. 4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절이라 했지만 경내까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길가에 세워진 천상천하유아독존상을 돌아나왔다.

 

해발 3,540m에 자리잡은 마낭(Manang)에 도착했다. 토롱 라를 넘기 전에 있는 마을 중에선 가장 큰 동네다.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EBC)를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체(Namche)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깊은 산골에 있으면서도 웬만한 편의 시설은 다 갖추고 있었다. 병원도 있고 빵집과 카페도 있었다. 산악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작은 영화관도 있다고 했다. 저녁을 먹기 전에 마을을 한 바퀴 휙 둘러보는 것으로 일차 구경을 마쳤다. 우리는 여기서 하루를 쉬며 고소 적응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렇다고 로지에서 마냥 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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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팩타민 2014.01.13 1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래간만에 트래킹 다녀왔을대가 새록새록 하네요.. ^^
    힘들어도 보는 풍경이 좋아서 가끔 사진을 봐도 두고두고 좋은 곳이 되었어요 ^^

    • 보리올 2014.01.13 1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산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히말라야 트레킹에 대한 동경이나 향수, 추억을 모두 가지고 계시겠죠. 벌써 히말라야를 다녀오신 모양이군요. 좋은 추억이 되어 삶의 활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